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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기, 백석 <선우사 - 함주시초4>

리뷰/시詩

by 밤톨쿤 2017. 11. 1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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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사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혜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어떤 멋을 부리지 않았는데도, 멋이 느껴진다. 정지용의 시처럼 모더니스트의 느낌을 주려는 시어 하나 등장하지 않는다. 백석의 시가 갖는 독특한 매력이다. 시어는 오히려 평범하고, 토속적인 사투리가 그대로 담겨 있다. 그저 평범한 문장 같고, 편하게 쓴 글 같지만, 막상 자세히 보면 어떤 것을 더할 필요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완벽한 시. 한 때 결벽증이 있었던 것처럼, 그의 깔끔한 성격이 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듯하다.

평범하고 조촐한 저녁을 먹으면서, 밥상에 모여 앉은 흰밥과 가재미와 자신을 소재로 시를 쓴다는 것도 재미난 부분이다. 백석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운 면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시심만큼은 확실히 순수한 면모가 있었던 것 같다.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사실 시 전체보다는 마지막 연,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하는 이 한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그저 직관적으로 너무 편안하고, 순수하고, 초연하고, 아름답게 와 닿았다. 그 중에서도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라는 표현이 상당한 임팩트가 있었다.

나도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는 백석의 마음이 공감이 된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할 때, 교회에서 마음에 합한 사람들과 교제할 때, 좋은 책을 읽고 있을 때, 그럴 때다. 아마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각기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은' 그런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순간들은 인간사에 있어서 딱히 새로운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백석은 그 흔하디 흔한 감정을 자신만의 문장으로 새롭게 표현하는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말았다. 세상살이를 잊게 된다는 그 흔하디 흔하고 진부할 수 있는 내용을 어쩌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순수한 듯 하면서도 세련되고, 투박하게 던지는 듯 하면서도 상당한 힘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읽고서는 '나도 이런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느끼고 공감하는 감정을 이토록 새롭게 제시해낼 수 있을까. 그 한 문장을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으면서도, 읽을 때면 아무런 억지 힘과 허세가 느껴지지 않는 이런 문장을 내 평생 단 한 문장 써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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