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부터 제목은 많이 들어봤던 아몬드.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심야책방의 날에, 어느 작은 서점에 들렀다가 눈에 띄어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서 책을 꺼내 읽었다. 워크샵 가는 비행기 안에서, 꼬박 다 읽었다.
책은 두 괴물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렇다. 괴물. 첫번째 괴물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라는 아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의사들은 윤재의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데다 뇌 변연계와 전두엽 사이의 접촉이 원할하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윤재는 기쁨, 고마움, 사랑, 두려움 등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쉽게 말해 희노애락애오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윤재의 엄마와 할멈은 그런 윤재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럴 때는 이런 감정이 드는 거야. 누군가 이렇게 했을 때는 이렇게 반응해야 하는거야. 라고 후천적으로 학습시킨다. 윤재의 인생을 위해.
그러나 윤재는 곧 세상에 혼자 남게 된다. 불의의 사고로 엄마는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 있게 되고, 할멈은 세상을 떠났다.
이제 윤재에게 삶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다. 특정한 상황에서 자기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해야 할 지, 윤재가 물어보고 기댈 사람은 없다. 윤재는 그저 엄마가 많이 했던 '정상적으로' 사는 것을 생각하며 행동했다.
두번째 괴물은 '곤이'라는 아이다. 본명은 '이수'. 엄마와 놀이공원에 갔다가 엄마를 잃는다. 엄마의 부주의 때문이었다. 그후 곤이는 어두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런 곤이에게는 오직 힘만이 질서였다. 곤이는 아주 거친 아이로 자랐다. 세상은 곤이의 마음 보다는 그 거칠고 폭력적인 행동만을 보고 곤이를 평가했다. 그럴 수록 곤이는 세상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더 거칠게 행동했다. 악순환이었다.
의학은 윤재에게 '감정표현불능증'이라고 진단 내렸고, 세상은 '곤이'에게 거칠고 나쁜 아이라고 진단 내렸다. 타인에게 자신을 재단 당한, 이 두 괴물의 짧은 성장 스토리가 아몬드에 담겨 있다.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하자면 이 책은 괴물들의 사랑 이야기다. 이 아이들이 어떻게 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알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 윤재는 병원에 의식없이 누워있는 엄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윤재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엄만 아무것도 듣지 못하니까요." 윤재는 희노애락애오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니까, 그렇게 생각할만 했다. 하지만 엄마와 할멈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은 윤재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윤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요." 라고 말하면서 윤재를 버려두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윤재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렴풋이 아주 어렴풋이 느끼게 될 때, 윤재는 엄마에게 와서 구구절절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까지 의미 없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라고 표현한다. 사랑이 윤재를 바꾸었다.
곤이도 마찬가지다. 제멋대로 행동하던 곤이가 윤재를 만나면서 차츰 바뀌기 시작한다. 윤재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다른 아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곤이를 보지 못한다. 굴복하거나, 피하거나 둘 중 하나. 하지만 윤재는 당당히 곤이와 맞선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니까. 곤이는 그런 윤재에게 흥미를 느낀다. 윤재의 책방에 찾아가 말을 걸기도 한다. 세상은 곤이에게 낙인을 찍었지만, 윤재에게는 그냥 곤이일 뿐이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더 자세하게 쓰고 알리고 싶지만, 이쯤한다. 더 얘기하면, 내가 올해 읽은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 책의 재미가 반감될까봐 걱정이 된다.
책은 윤재의 시점에서 담담하게 쓰여있다. 희노애락애오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의 시선답다. 윤재는 자기와 곤이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엄마, 할멈, 심 박사, 도라, 윤 교수와 윤 교수의 아내.. 모든 사람들의 스토리를 덤덤하게 전해준다. "이건 사랑이야!" 라고 티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덤덤해서 더 감동적이다. 사랑을 따라갔고, 사랑을 지켜냈고, 사랑을 깨달은 모든 이들의 이야기. 책의 모든 페이지에는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은연 중에 흐르고 있다. 비행기 안에서 몇번이나 눈물이 그렁거렸다.
책을 다 덮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히 이 책에 구구절절 평가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윤재와 곤이의 너무나도 순수한 사랑이야기에 뭔가 더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책이고, 기억에 오래 더 남겨두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언어'로 기록을 남겨둔다.
*엄마는 모든 게 다 나를 위해서라고 했고 다른 말로는 그걸 '사랑'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엄마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하려는 몸부림에 더 가까웠다. 엄마의 말대로라면 사랑이라는 건, 단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 저럴 땐 저렇게 해야한다, 사사건건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 게 사랑이라면 사랑 따위는 주지도 받지도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 37쪽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 속의 세계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더 이상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예를 들어, '갈색 쿠션이 있는 약각형의 집에 노란 머리의 여자가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책의 문장이라면 영화나 그림은 여자의 피부, 표정, 손톱 길이까지 전부 정해 놓고 있었다. 그 세계에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책은 달랐다. 책에는 빈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단어 사이도 비어 있고 줄과 줄 사이도 비어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앉거나 내 생각을 적을 수도 있다. - 45쪽
*남자의 일기장에는 그가 세상을 증오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남자의 삶과 기록들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자, 대중의 관심은 사건 자체보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사회학적 조명으로 바뀌었다. 남자에 대한 동정 여론이 퍼지기 시작했고, 초점은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대한민국의 현실로 옮겨 갔다. 누가 죽었는지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건은 얼마간 뉴스를 장식했고 기사엔 '누가 이 남자를 살인자로 만들었나.', '웃으면 죽어야 하는 나라, 대한민국' 따위의 표제가 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품이 꺼지듯이 그마저도 사람들의 입에 더는 오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열흘이었다. -57쪽
*
― 엄마에게 말씀드려 보렴.
― 뭘요?
― 네가 고등학생이 되었고 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고 말이다. 엄마가 좋아하실 거다.
― 그럴 필욘 없어요. 엄만 아무것도 듣지 못하니까요.
심 박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도, 그건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 82쪽
*미쳐 날뛰던 아내의 심장이 갑자기 멎었다. 전기 충격기도 없었고 코드 블루를 외쳐 봐야 뛰어올 사람도 없었다. 박사는 아마추어처럼 가망 없는 가슴에다 미친 듯이 펌프질을 했다. 한 시간이나 지나서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아내의 몸은 이미 차갑고 딱딱했다. 그렇게 아내는 그를 영원히 떠났고 그 뒤로 박사는 메스를 놓았다. 자신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러면서도 왜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는지만 돌이켰다. 다시는 누군가의 살을 갈라내 그 안에서 뛰는 심장을 볼 자신이 없었다. - 117쪽
*어딘가를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잡았던 걸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슬며시 힘을 뺄 때면 엄마는 눈을 흘기며 얼른 꽉 잡으라고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쪽 손은 할멈에게 쥐여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 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 153쪽
*
―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정말 사랑해요. 아름다운 밤입니다!
가요 프로를 즐겨 보던 엄마 덕에 수없이 봐 온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의문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말이 저렇게 흔하게 쓰여도 되는 걸까.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쓰다 결국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괴테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떠올려 봤다. 사랑이 변했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집착하거나 학대를 가한다는 뉴스도,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용서한 이들의 이야기도.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는 한 사랑이라는 건, 어떤 극한의 개념이었다.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간신히 단어 안에 가둬 놓은 것. 그런데 그 단어가 너무 자주 쓰이고 있었다. 그저 기분이 좀 좋다거나 고맙다는 뜻으로 아무렇지 않게들 사랑을 입 밖에 냈다. -158쪽
*그 순간 내 입에서 엄마, 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나는 조용히 엄마에게 그 동안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하지 않은 얘기가 너무 많았다. 당연하다. 아무런 말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천천히 말했다. 할멈이 세상을 떠나고 나 혼자 남았다고.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겨울, 봄, 여름이 지나고 벌써 가을이라고. 버텨 보았지만 결국 책방을 정리하게 됐노라고.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말을 마치고 뒤로 물러섰다. 도라가 나를 향해 웃어 주었다. 엄마는 여전히 천장의 별자리만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엄마한테 말을 해 보니 그렇게까지 의미 없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심 박사가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빵을 굽는 게 이것과 비슷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2쪽
*윤 교수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답을 내놓았다.
― 곤이는 착한 애니까요.
―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알고 있다. 곤이가 착한 아이라는 걸. 하지만 구체적으로 곤이에 대해 말하라면 그 애가 나를 때리고 아프게 했다는 것, 나비를 찢어 놓았다는 것, 선생에게 패악질을 부리고 아이들에게 물건을 집어 던졌다는 것밖에 말할 게 없다. 언어라는 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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