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회사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뒤로 많은 사람이, 내 앞으로는 많은 자동차가 지나갔다. 버스를 기다리다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버스 측면에 있는 광고들을 보게 된다. 직업이 마케터다보니, 광고를 보면 카피는 어떤지 디자인은 어떤지 나름대로 평가해 보게 된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한 광고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정확히 말하면, 광고 그 자체보다는, 광고 속 배우의 눈빛이 나를 사로잡았다는 표현이 맞다. 영화 포스터였다. 어떤 감정의 표현인지 모를 표정을 한 배우가, 인상적인 눈빛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영화 <박열>을 처음 인식하게 된 순간이었다.
영화 <박열> 포스터
이제훈의 눈빛에 사로잡혀 ‘꼭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 대략으로라도 며칠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지난 후에 마침내 영화를 보러 갔다. 스토리는커녕 감독도 누군지 모르고 갔다. 영화관에 앉고 나서야 아내가 “우리는 이준익 감독 영화만 보러 오네.”라고 해서, 그제야 이 영화의 감독이 이준익인 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 동주 이후 처음 영화관에 온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였다.
영화 <박열>은 독립운동하신 분에 관한 내용인 것만 알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무의식중에 뭔가 장엄하고, 굵직한 느낌의 무엇인가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지금 내가 기억하기로는, 러닝타임의 90% 이상이 유쾌하고 가벼운 흐름으로 흘러갔다.
일본 관료들의 우스꽝스러운 경례 동작은 아직도 기억난다. 독립운동가의 모습도 사실적이었다.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불령사의 조직원들은 엘리트 지식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자기들끼리도 치고받을 정도로 투박한 청년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도 모르게, 독립운동가분들의 고결한 헌신과 업적 때문인지, 그들이 인간인 줄 알면서도 또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독립운동가, 역사에 한 줄 남긴 업적이 있건 없건 그 존경스러운 이름들은 결코 완전한 인격체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 사람도 있었고, 미성숙한 면도 있었을 것이고, 엘리트들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관용과 포용력이 넘치는 사람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불령사 조직원 스틸컷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에서처럼 의견이 안 맞으면 자기들끼리 욕도 하고, 어리숙하지만 친근한 사투리도 썼을 것이다. 앞으로의 일을 언제나 제대로 예측할 만큼 수가 높은 사람들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고 이들이 일순간에 형편없는 사람들로 전락해 버리는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글을 쓰는 지금, 그분들께 대한 존경심이 더 생기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불완전하면서도 그들은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하고자 했고, 해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더 대단하지 않은가. 공자 같은 인격도 아니고, 관우 같은 용맹함과 강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일제를 대항해 싸울 생각을 했다는 것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말았던 것이 더욱 존경스러운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 "내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한 박열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영화가 끝나고 내 마음속에 한동안 남아있던 생각이 하나 있다. 감독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것은 영화가 나에게 던져 준 질문이기도 했다. 그 질문은 박열과 후미꼬로부터 왔다.
이 영화는 독립운동가의 삶을 다루고 있다. 분명 항일 운동에 포인트가 있지만, 박열과 후미꼬의 관계에도 포커스가 맞춰있다. 항일 운동이 큰 주제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영화의 다가 아니며, 두 사람의 사랑을 중심으로 중요한 스토리가 흘러가지만, 그렇다고 사랑 자체만 다룬 것도 아니다. 이준익 감독의 입체적인 연출력이 빛났다. 두 사람의 관계가 영화에 유쾌한 진중함을 만들어냈다.
영화의 한 장면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라고 한 그녀의 대사가 상당히 인상 깊다
박열과 후미꼬는 동지다. 같은 길을 걸었다. 끝까지.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걷게 된 동기는 사뭇 다르다. 후미꼬는 자신이 아나키스트가 된 이유를 자신의 성장 경험에서 찾는다. 그녀의 불우한 경험은 그녀를 무적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조선의 독립을 위했다기보다는, 아나키스트로서 천황을 부정한 것으로 보인다.)
박열이 투쟁한 동기는 영화에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후미꼬처럼 불우한 경험으로 인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추측하건대, 조선이 처한 상황을 조선인으로서 이겨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법정에 조선의 옷(사상의 옷도 포함한 표현이다)을 입고 나타난 것을 보면 내 생각이 마냥 틀린 것만 같지는 않다.
말하자면 후미꼬는 개인의 경험을 시작으로 대의까지 나아갔다. 나의 경험을 나의 것으로 국한하지 않고, 나와 같은 수많은 사람을 위해서까지 자라난 것이다. 반면 박열은 조선의 안타까운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조국의 상황이라고 하는, 어찌 보면 거대한 추상을 자기화했다.
실제 박열과 후미꼬의 사진. 당시 동아일보(1927. 01. 21) 기사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친한 친구와 시대의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위인들이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친구는 반대 의견이었다. 친구는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그 시대에 있었기 때문에 위인이 될 수 있었던 거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시대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으니까 위인이지.”
그때도 지금도 나는 친구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그 시대에 모든 사람이 다 박열이 되지 않았고, 독립운동가가 되지 않았는가? 시대가 위인을 만들었다면 말이다. 왜 모두가 후미꼬가 될 수 없었는가. 난세에 위인이 난다는 말은 맞지만, 난세라고 해서 모두가 위인이 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무엇이 박열을 박열 되게 했는가
앞서 말한, 영화를 통해 내가 받은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왜 소수의 사람만이 후미꼬처럼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만 두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가는가? 그런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인가?
왜 어떤 사람은 국가의, 시대의, 다소 추상적인 대의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세상과 싸우는가? 그런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인가?
개인은 자기가 속한 상황에서 부당한 일을 겪는다. 나는 어린 시절에 가난하게 컸고, 군대에서도 부당한 일을 보았다. 하지만 곧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젊은 날에는 기득권과 싸웠다가 나중에는 기득권이 되어 권력을 유지하려는 추한 모습을 보이는 정치인들과 내 모습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현시대에는 대의적으로 고민할 문제들이 많다. 국가적으로는 복지문제, 안보문제, 경제문제, 교육문제, 세계적으로는 환경문제도 아주 중요하게 고려할 문제다. 하지만 나는 이런 거대한 문제들을 그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관심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과거의 위인들이 지금 시대에 온다고 반드시 위인이 되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대중의 하나라면, 일본강점기에 살았어도 대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두 달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과연,
무엇이 후미꼬를 후미꼬로 만들었는가?
무엇이 박열을 박열 되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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